
네 안녕하세요 저를 소개하자면 오늘 선생을 하는 첫번쨰 시간 늑대라고 하고 오늘부로 여러분에게 교육을 시켜주죠 오늘은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알려드릴 게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국민들이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 존재만으로 애국심과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한국사의 대표적인 구국영웅이다.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사 최고의 위인으로 높은 위상과 명성을 자랑하는 인물이요[15],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살펴보아도 이름을 떨친 호레이쇼 넬슨 같은 명장들은 모두 정부의 많은 지원을 받고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이순신은 정부와 외부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이순신이 정부와 명나라 육군에게 식량, 무기, 종이, 부채, 조총 등 각종 물자와 진상품을 지원해야 하는것도 모자라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생계까지 직접 돌보면서 전쟁을 수행해야 했으며 심지어 권율 휘하의 육군이 허락도 없이 이순신이 어렵게 마련한 수군이 먹을 식량을 시도때도없이 약탈하고 수군 병력을 마음대로 빼내어 육군으로 편입시키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급자족했으며, 휴전기 당시 수군 기지에 전염병이 크게 퍼져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음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군비를 꾸준히 확장하여 최강의 함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수군을 이끌고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하여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끝에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한 기적을 이뤄냈다.
이순신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전쟁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적의 보급을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전쟁의 흐름 자체를 바꿔 망국으로 치닫는 나라를 구해낸 불세출의 명장이다.[16] 특히 임진왜란 초기 2차 출동 당시 첫 해전이었던 사천 해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적이 쏜 총탄에 왼쪽 어깨를 관통당해 중상을 입는 큰 부상을 당하여 피가 발꿈치까지 흐르는 상황임에도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고통스러운 기색도 없이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지휘했으며, 칼로 살을 찢어 박혀있는 탄환을 제거한 뒤 부하들과 평소처럼 담소를 나눴다고 한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철수하는 일본군 함대 500척을 추격하여 퇴각로를 차단한 뒤 공격을 퍼부어 전선 200척을 깨부수고 100척을 포획하며 일본군 수만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날이 밝아 올 무렵에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순신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극한을 펼친 인물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크나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라와 임금에게 버림받았고 원균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파직되어 옥살이를 했으며, 피땀 흘려 키워놓은 군대가 궤멸되고 어머니와 막내아들을 잇따라 잃는 등,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고 절망적이며 고난과 역경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을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난을 평정한 뒤 홀연히 성스러운 자태를 감춰서 그런지 우리나라에서는 단지 영웅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너무나 위대한 인물이기에 성웅이라는 칭호로 불리며, 민족의 태양, 바다의 신, 전쟁의 신으로 불리는 유일한 위인이다.
조선 후기 효종, 숙종, 정조도 이순신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17]
일본군의 조선 침략 당시 3주 만에 서울, 2개월 만에 평양을 함락시키는 등 전세가 일본군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던 차에 조선군 장수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수군을 거느리고 전투마다 앞장서서 진두지휘하며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하여 승리했고, 이를 통해 일본군의 북진 중단, 명나라군의 파병 등에 일조하면서 참화 속의 조선을 구해내고 침략군인 일본군의 야욕을 완전히 꺾어버린 명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군공 이외에도 휘하 장병을 원리원칙에 기반해 철두철미하게 관리하고 상업에도 종사하여 자급자족을 이루어 군을 자립시켰으며, 왜란 이전에도 이이 등의 고위 관료와 접선을 수 차례 거절하거나 축재를 하지 않았고, 현감 재임기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등 지휘관이요 목민관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관리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겪고도 마지막까지 직접 출전해 분투한 철인의 면모까지 갖춰, 조선 중기의 명장을 넘어 한국사 최고 위인의 반열까지 오른 인물이다. 저서로 난중일기, 서간첩, 이충무공전서, 전시 장계(보고서)를 모은 것으로 임진장초, 충민공계초가 있다.
생전부터 그를 사적으로 알고 있던 인근 백성이나 군졸, 일부 장수와 재상들에게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고 안면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제법 있었으며, 전사 소식에 많은 이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조정은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시(詩)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이순신은 오래도록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앞서 말했듯이 현대 한국에서 성웅이라는 최상급 수사가 이름 앞에 붙어도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18] 세종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조선사 양대 위인이다.[19]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세종대왕과 1, 2위를 다투며[20]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실제로는 김시민과 같은 여러 장수들이 함께 받은 시호이지만 현대 한국인들은 대부분[21] 이순신의 시호로 인식한다.
1545년 한성부 건천동에서 태어나 1576년(선조 9) 식년 무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여 그해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이 되었고, 1579년에는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1580년에 전라도 발포 수군 만호, 1581년에 경차관 서익에 의해[22] 파직되었다가 1582년에 다시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었고 1583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군관, 함경도 건원보 권관을 지내다가 3년간 부친상을 치르고 1586년 함경도 조산보 만호에 임명되었으며 1587년 함경도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했다. 이 해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일부 백성이 납치되고 반격으로 녹둔도 전투를 치르는 등의 일이 있었다. 이때 함경북병사 이일이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경비 소홀에 참수형을 청했고[23] 이는 면했으나 다시 파직 및 백의종군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1588년 시전부락 전투에서 세운 군공으로 복직되었다.
1589년에 전라 감사의 군관이 되었고 정읍 현감에 제수되어 백성을 다스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으며 태인 현감도 겸했다. 그리고 진도 군수, 배포 첨사 임명장을 받고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된다. 일찍이 일본의 침공을 예상하고 전함 건조, 무기와 군비 확충, 군사훈련 등에 힘썼다. 1592년에 일본군의 침공이 시작되었고,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 적진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2차 출병 때는 사천 해전과 당포 해전, 당항포 해전, 율포 해전에서 승리했다. 이후 한산도 해전에 크게 승리하고 안골포 해전에서 승리했다. 두 달여 뒤에 재출병해서 부산포 해전에서 승리했다. 1593년 웅포 해전에서 승리하고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으며 삼도 수군 통제사로 선임되었고, 이 시기에 조총을 모방해서 총을 제조해 보기도 했다. 1594년 당항포 해전에서 승리했고 윤두수가 건의한 수륙 합동작전에 참여해서 영등포, 장문포를 공격했지만 강화 협상 중이라 일본군이 대응하지 않아서 별 성과는 없었다. 1595년에는 우수영과 둔전을 시찰하고 백성을 모아 소금을 굽고 둔전을 통한 곡식을 확보하는 등 생업에 종사했고 1596년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들을 위해 여제를 지냈다. 1597년에 원균에게 인계하고 체포되어 상경한 후 투옥되었고, 선조가 사형을 제의했으나[24] 정탁이 변호하면서 출옥하고 두 번째 백의종군 처분을 받는다. 이후 모친상을 겪었으며 원균이 출전한 칠천량 해전에서 그간 육성해온 군과 자산을 거의 궤멸당했으나 통제사에 재임명된 후 소수 병력으로 출전한 명량 해전에서 승리했다. 이후 셋째 아들 이면이 전사했고, 1598년 조선에서 철군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노량 해전을 치르던 중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죽음을 함구하고 전투를 지속하라는 말을 남겼고 그가 죽은 뒤에 전투는 승리로 끝났으며 그와 함께 일본-조선-명이 얽힌 지옥과 같았던 전쟁도 끝났다.
몇몇 전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뤄낸 것인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이다.[25] 가령 명량 해전 초반부에서 물살이 바뀌기 전까지 약 2시간 가량 이순신은 대장선 1척으로 일본 측 함선 133척과 정면으로 붙어 하나하나 박살내고 있었다.[26] 분명히 조선 측과 일본 측의 풍부한 사료로 교차검증이 가능한 기록임에도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히려 왜곡된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믿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전투 수행 능력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기록을 보면 전략적인 식견 자체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군의 총 전력은 일본군보다 열세였지만 대부분의 전투를 수적 우위를 점한 채로 압승을 거두며 심할 때는 이러한 각개 격파가 하루 동안 5~6번이 일어나 그 전투들만으로 출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일본군을 수장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연합 함대를 중시하여 항상 만전의 화력을 갖추고 싸우는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전투를 벌인 때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만한 완벽한 함정을 팠거나(한산도 대첩),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출정해야 했거나(장문포 해전), 그 이상 전투를 피하면 나라가 망하는 때(명량 대첩)뿐이었다.
이순신은 함대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전 국토가 전쟁의 화마로 털리는 바람에 교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했던 중앙 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27]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어로 활동으로 군량과 군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기피 대상이었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벗고 뛰어다닌 결과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과 화포를 만들 철이 부족하여 조정에 철을 조달해 줄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장계를 올린 것 정도다. 원균이 5천명의 병력을 지원받고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특히 자기 휘하로 피난 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충성심 덕에 적국이었던 일본조차 사후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28]
이 밖에도 독보적인 정직함과 청렴함[29]과 공정함도 현대 한국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다. 이순신은 장수이자 목민관으로서 그야말로 공명정대하였는데, 백성들과 일개 병졸부터 시작해서 승려와 노비까지 하나 하나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이룩한 공을 빠짐없이 세세히 적어 장계를 올려 포상을 받게 했으며, 여차할 땐 자신의 공적을 부하들에게 돌려주는 경우도 허다했다.[30] 허나 자기 휘하 사람들을 마냥 너그럽게 대했냐고 했다면 그것도 아닌데, 훈련을 게을리 하거나 군법을 어기는 병사들을 매우 엄히 다스렸기에 조선 수군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왜군이 아닌 이순신[31]이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고로 이순신은 당근과 채찍을 정확히 다루어 부하들을 부렸다고 할 수 있겠다. 또 이런 사람이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기에 때맞춰 등장하여 경이로운 활약상을 남긴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되겠다. 만약 이순신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조선은 수륙 협공을 통하여 일본에게 순식간에 먹혔을 것이고, 이후 명과 일본의 땅따먹기 전면전으로 조선은 말 그대로 가루가 됐을 것이다.
이렇듯 이순신을 뜯어 보자면 '존경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순신은 완벽한 인물이었고[32][33], 이러한 덕에 40여 년 가까이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3. 역임 관작[편집]
사후 추증된 관작
유[34]명 수군 도독 조선국 증[35]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36]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덕풍부원군 시[37] 충무공
(有明 水軍 都督 朝鮮國 贈 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德豐府院君 諡 忠武公)
해석:
명 직위: 수군 도독[논란]
공신호: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39]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40]
조선 직위: 의정부 영의정[41]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42]
봉호: 덕풍부원군[43]
시호[44]: 충무공
생전(전사 직전)의 관작
행[45] 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行 正憲大夫 全羅左道 水軍節度使 兼 三道水軍統制使)
해석:
품계: 정헌대부[46]
직위: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47]
상기된 80여 자의 기나긴 직위명들을 현대식으로 풀이하자면, 이 충무공은 생전에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으로서 장관급의 명예직에 상당하는 의전 예우를 받은 뒤[48], 해군작전사령관 및 함대사령관을 겸직하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도 미 해군 원수직을 수여받은 셈이 된다. 나아가 사후에는 대한민국장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총리급의 명예직과 예우를 수여받은 것이 된다. 훈장의 경우에는 다소 애매한 비유이지만[49], 수여된 관직들의 경우 일반인들이 쉽게 인식하는 현재의 관제로 비교하자면 위와 같은 셈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미 해군 대원수직[50]을 동시에 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군사적 업적을 인정 받아 예우에서 밀리지만 미국에서 명예 원수로 대우하는 셈이고, 죽은 뒤 200년 가까이 되어서 국무총리를 부여받은 격이다.[51]
생전에 이순신이 계급이 낮을 때 장군이라고 불린 적은 있었겠지만,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던 시절이나 최종 계급을 생각하면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히 틀린 호칭이다. 상기된 직책들 가운데 가장 품계가 낮은 직책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인데, 수군절도사면 절충장군 품계로 장군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품계 중 최상의 품계이며, 또한 당상관에 해당되었다. 당연히 조선시대에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관리에게, 통제사또나 영감이라고 부르지,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는 일은 없었다.[52] 게다가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는 종2품 직으로 가의/가선대부 품계가 필요했는데 이는 엄연히 영감이라고 불리는 문반 품계였으니 장군이라고 부르면 모욕이었다[53]. 그러나 현대의 통상적인 장군이라는 호칭이 대중들에게 좀 더 익숙하게 다가오는 말이었고, 여러 미디어에서 대중들에게 익숙한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면서 이순신 장군이라는 칭호가 굳어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이나 관련 관계자들은 현대에 육군 계열의 칭호로 쓰이는 장군 칭호를 기피하고 대신 해군이 사용하는 칭호인 제독을 붙여서 이순신 제독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서 육군 장성은 장군, 해군 장성은 제독 칭호를 쓰기 때문이다.[54]
시대적으로도 장군이라는 명칭은 맞지 않고, 현대 기준에서는 제독 혹은 원수라고 부르거나, 당시 기준으로 정3품부터는 군대를 전역하고 문관으로서 올라가야 했기에 더이상 장군이 아니라 사또나 영감 그리고 정2품부터는 대감이라고 불러야 한다. 따라서 수사또, 수사 영감, 통제 사또, 통제사 영감, 통상 대감(정헌대부 시절), 종3품 이하일 땐 전부 나리(나으리) 등으로 부르는 게 올바른 역사적 고증이다. 이순신/평가 문서로. 외국에서도 이순신 같은 해군 지휘관은 철저히 Admiral이라고 붙여 부른다.[55] 당시 조선군의 육해군 구별이 유별하지 않아서 장군으로 불러도 문제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이순신이 오늘날의 장성급 지휘관에 해당하는 보직을 육군에서 맡았던 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의 최종 육상 보직은 조산보 만호(혹은 정읍 현감. 정읍에는 해안선이 없다.)이고, 병마 절도사나 관찰사처럼 오늘날의 ‘장군’에 해당하는 직책을 맡지 않았다. 즉슨 그의 최종 관직을 일일이 붙여서 호칭하는 게 아닌 이상 국제적인 관례대로 제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다.
다만 현대에는 장군이란 단어가 남북한을 통틀어 무(武)의 최고봉격인 인물에게 흔히 사용되는 호칭이고[56][57], 당장 충무공을 이순신 '장군' 대신 이순신 '제독'이라 호칭하는 경우를 상상해본다면 일반 언중들이 받아들이기에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엄격히 충무공의 호칭을 구별짓는 것이 아닌 이상, 대중이 이순신을 장군이라 칭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4. 용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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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해군사관학교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 (광화문광장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동상보다 더 실제에 가깝다는 평가가 많다.)
5.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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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의문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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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사망과 관련된 여러 설들과 각종 음모론을 모아놓은 문서. 검증되지 않은 집단 연구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니 이를 감안해서 읽어야 한다.
여담으로 거의 모든 인물들과 달리 이순신은 본인이 살던 시대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논란에 빠진 적이 없었다. 특히나 1990~2000년대에 이순신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기존 군부 독재 정권인 박정희 정권이 이순신의 공적을 부풀려 프로파간다로 이용했다는 주장과 더불어 원균의 미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즉, 작은 흠결이라도 있으면 바로 나올 정도로 미친듯이 털어댔으나, 고작 찾은 흠결이라고는 실록에 적힌 너무 고지식하여 굴할 줄을 모른다는 내용이 전부이며, 실록, 징비록 등 온갖 기록으로 교차검증을 해 봐도 흠결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나마 이순신에 대한 비판이 가장 많은 기록이 하나 있긴 한데... 바로 본인이 쓴 난중일기이다.[58]
7. 전투 관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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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가족[편집]
아버지 이정(1511~1583), 어머니 변씨 부인(1515~1597) 슬하 3남으로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외동딸 방수진을 아내로 들였고 병마사 오수억(吳壽億)의 서녀인 첩 해주 오씨가 있었다.
방수진과의 사이에 장남 이회, 차남 이예[59], 3남 이면[60]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장녀는 홍가신의 아들 홍비와 혼인했다. 해주 오씨와의 사이에서 서자 이훈(李薰)을 두었고, 오씨 소생인지 아니면 또 다른 첩 소생인지 알 수 없는 서자 이신(李藎)과 서녀 2명이 있었다.
오씨외에 이순신에게 '부안댁'이라는 첩이 있었고 이신과 두 서녀가 그녀 소생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건 전적으로 난중일기의 번역자들의 창조번역이다.
1594년 8월 2일. 꿈을 꾸었는데, 부안 사람(扶安人)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계산했더니, 태어날 달이 아니었다. 꿈이었지만 쫓아 보냈다.
1594년 11월 13일. 저녁에 윤련이 왔다. 그의 누이 편지를 갖고 왔다. 헛된 말이 많았다. 우스운 일이다.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이는 곧 남은 어린 세 자식이 끝내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이구나.
1597년 10월 25일. 몸이 몹시 불편했다. 윤련(尹連)이 부안에서 왔다.
난중일기 원문에는 그냥 부안사람이라는 뜻의 부안인(扶安人)이라고만 적혀 있었는데 난중일기를 번역한 홍기문, 이은상 등은 아무런 문헌근거도 없이 부안댁이라는 첩이 있다는 사족을 붙였고 윤련이 누이 편지를 갖고 왔다, 윤련이 부안에서 왔다는 기술을 근거로 윤련이 이순신 첩 부안 윤씨의 오라비라 주장했다. 근거는 전혀 없다. 부안인, 윤씨는 덕수 이씨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 난중일기 원문에는 그저 부안사람과 윤련의 누이로 적혀 있다. 아무 근거 없이 부안 사람, 혹은 윤련의 누이를 '이순신의 첩'이라는 쓸데없는 사족을 달아 번역하는 것은 과잉 번역이다.
이순신의 서녀 중 1명은 윤효전(1563~1619)의 첩이 되었는데, 윤효전은 바로 현종~숙종 연간 남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윤휴의 아버지다. 다만 윤휴는 이순신 서녀의 소생이 아니라 윤효전의 적자고, 윤효전과 이순신의 서녀 사이에 태어난 사람은 윤영(1611~1691)으로 그가 윤휴의 이복 형이다.
이순신의 부친 이정은 음서로 벼슬에 올라[61] 최종 직위는 종5품 창신 교위에 이르렀으나 실무를 맡은 게 아니었고 일종의 임시직이나 명예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62] 1583년 11월 15일 타계했는데, 고향의 소식이 늦어 이순신은 부친의 부고를 50일이나 지난 후에야 접하고 뒤늦게 달려가 3년상을 치렀다. 사후 1604년에 아들 이순신의 막대한 훈공으로 좌의정에 추증되고 덕연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전라 좌수사에 취임한 직후 어머니 변씨를 여수의 고움내(현대의 여수시 웅천 지역)라는 곳에 모시고 봉양했는데, 현대에도 여수에는 '이순신 자당기거지'[63]라고 해서 변씨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어머니도 상당히 강직한 여성이었는데, 《난중일기》를 보면 문안 인사를 하고 떠나는 아들 이순신에게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고 격려한 기록도 남아 있다. 이때 이순신은 어머니의 모습을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마음으로 탄식한 빛이 없으셨다"라고 묘사했다.[64] 1597년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백의종군을 떠날 때, 변씨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관을 싣고 오다가 병사했는데, 이순신은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도 모자라, 임지로 떠나는 길이라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바로 떠나야 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의 이순신이 느낀 애통함은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나가는 중에 아들 울이 종을 보내 "아직 배 소식이 없다."하였다. (중략)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알렸다. 뛰쳐나가 가슴을 두들기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하다. 즉시 갯바위로 달려나가니 이미 배가 와 있었다. 이 애통함을 글로 다 적을 수가 없다."
정유년 4월 13일(1597년 5월 28일) 《난중일기》
竭忠於國而罪已至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으나 죄가 이미 미쳤고
欲孝於親而親亦亡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자 하였으나 부모마저 돌아가셨네.
天地安如吾之事乎
세상에 어찌 나같은 사람이 있으랴?
不如 早死也
속히 죽느니만 못하다.
정유년 4월 19일(1597년 6월 3일) 《난중일기》
글을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날 지경. 더 기가 막힌 것은 모친의 본관이 초계인데, 이 지역은 다름아닌 이순신의 귀양지다. 어머니의 죽음에는 선조도 일정부분 기여한 공이 있다. 아들이 의금부에 잡혀갔다는 소식에 놀란 어머니가 연로한 나이에다 건강도 나쁜 몸인데도 아들을 보기 위해 아산까지 직접 오기로 했고 결국 아산에 오기 전 건강이 악화되어 배 위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순신의 아내인 방수진(方守震)은 무관 출신으로 보성 군수를 역임한 방진의 딸인데, 대단한 여장부 기질이 있었던 모양. 어린 시절 방씨 집에 도적들이 쳐들어오자 방진이 방문을 열어놓고 앉아 활을 쏘며 저항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방수진이 베틀에 쓰는 대나무 가지더미를 바닥에 와르르 쏟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버지!! 여기 화살들이 있습니다!!"라고 소리쳐 화살이 많이 남아 있다고 속여서 도적들이 도망갔다는 야사가 있다. 또한 류성룡의 글[65]에 따르면, 사위인 홍비가 체구가 작아서 마음에 차지 않다며 집에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집안 노비들을 거느리고 직접 농사를 지어서 집안을 유지하며, 대단히 성격이 강해서 집안 사람들 중 아무도 그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고 나온다. 이에 대해 류성룡은 "참으로 장수(將帥)의 집안에는 장수의 아내가 있다"며 감탄했다. 방씨가 사위를 박대한 이유로 단순히 사위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대 집안에 대한 항의라는 해석도 있다. 이 사위의 아버지는 이순신의 친구인 홍가신이다.[66] 그런데 홍비는 이 결혼이 재혼이었다. 홍비의 첫 번째 부인이 일찍 죽어서 이순신의 딸과 재혼한 것. 첩으로 들인 것이 아니라 재혼한 것이므로 딱히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이지만, 조선 시대에 재취로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게 당시 풍습이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방수진이 사위를 박대함으로써 홍가신 집안에게 항의 표시를 했다는 해석이다.
방수진의 본명은 오랫동안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에 와서는 그냥 '방씨', 혹은 본관을 붙여 '상주 방씨'라고 불려졌다. 일부 야사 및 창작물에서 '연화', '태평'' 등의 이름이 나오긴 했지만 이를 증명할 근거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난중일기, 임진장초와 함께 국보 76호로 지정된 서간첩[67]을 연구한 결과 본명이 '수진'임이 밝혀졌다. 다만 이에 대해선 '수진'은 방씨의 이름이 아니라 이순신의 장인인 방진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허나, 위 기사 속 반박은 시대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의견이라 아쉽다. 이순신이 부계 쪽인 살던 서울에서 출생하여, 모계쪽이 있던 아산으로 온 것이나 자신의 사후부터 장인으로부터 받은 현중사가 자신의 부계로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타당성도 있을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그녀도 병을 앓아서 전란 중에 사경을 헤맸다는 기록도 있는데, 아들 이회가 1603년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사직하는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순신의 전사 후인 1603년까지는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류성룡은 저서인 《징비록》의 평가에서, 모두가 이순신 장군을 영웅적이고 위엄 있는 인물이고 장수로 생각하지만, 장수로서 위엄 있는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글을 읽는 단아한 선비 같다고 하였다.
가족에 대해 자상한 부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가 몇 있다. 이순신의 두 형 이희신과 이요신은 각각 4명과 2명의 자식을 남기고 비교적 일찍 죽었는데, 이순신은 이 6명의 조카를 친자식 못지 않게 잘 키워냈다. 특히 정읍 현감으로 부임할 당시에 이들 조카들을 데려가면 파직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조선은 유교 사상 덕에, 기본적으로 세금 = 백성의 부담으로 보고, 최대한 세금을 적게 걷어 필요한 데만 쓰는 식의 굉장한 긴축 재정을 강요받는 행정 체제를 가지고 있어서, 행정관이 가솔들을 데려와 먹여 살리는 것은 충분히 탄핵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이다. 이른바 남솔(濫率)이라고 해서, 지방관이 가솔을 제한 이상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당대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카들이 부모가 모두 죽어 천애고아라 의지할 곳이 나뿐인데, 어찌 두고 가는가? 차라리 파직당할지언정 조카들을 버릴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눈치 안 보고 조카들을 다 부임지로 데려갔다. 하지만 그가 정읍 현감으로 있는 동안 가족들이 보여준 처신은 정읍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대단했다고 한다. 이 조카들의 혼례를 다 치러낸 후에야 자신의 친자식의 혼례를 했을 정도.
晨昏戀慟淚凝成血
조석으로 그립고 애통하여 눈물이 엉겨 피가 되어 흐르거늘
天胡漠漠不我燭兮
하늘은 어찌 무심하게도 나를 굽어살피지 않으시던가?
何不速我死也
어찌 속히 죽이지 않으시나?
정유년 5월 6일(1597년 6월 20일), 《난중일기》, 꿈 속에서 죽은 두 형을 만난 후[68]
아들 사랑 또한 지극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셋째 아들 이면이 아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의 《난중일기》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심금을 울리는 애틋한 문장으로 가득하다.
"새벽 2시쯤 꿈에서 말을 타고 언덕을 달릴 때 말이 실족하여 내가 물에 빠졌다. 그런데 물에는 빠졌으나 쓰러지지는 않았으므로 보니 면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듯 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중략) 천안에서 사람이 와서 집 편지를 전했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눈앞이 아찔하고 골육이 진동했다. 대충 뜯고 겉을 보니 '통곡'이란 두 글자가 써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았다. 통곡하고 또 통곡하도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하실 수가 있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은 무슨 괴상한 이치란 말인가.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보인다. 슬프다, 내 작은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네가 유독 출중하고 영민하여 하늘이 세상에 남겨두지를 않으시는 것이냐, 나의 죄가 네게 화를 미쳤느냐. 나는 세상에 살아있지만 장차 어디에 의지하랴. 함께 죽어 너와 지하에서 지내며 울고 싶으나 네 형, 누나,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질 것이니 참고 연명하겠다만 혼은 죽고 가죽만 남아 부르짖고 서글피 울 뿐이다. 하룻밤을 넘기기가 한 해와 같도다."
정유년 10월 14일(1597년 11월 22일) 《난중일기》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이면)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정유년 10월 16일(1597년 11월 24일) 《난중일기》
"새벽나절에 꿈 속에서 고향의 종자 진(辰)이 찾아왔기에 면이 생각나 통곡하였다."
(중략)
"한밤에 생각하자니 눈물이 흐르는데, 어찌 다 말하겠는가. 기어이 내 불효함이 예까지 이를 줄 누가 알았으랴.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니 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정유년 10월 19일(1597년 11월 27일) 《난중일기》
이순신은 이때 부하들이 있는 곳에서는 울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난중일기》에서는 종 강막지(姜莫只)의 소금 창고에 "숨어서 울었다."고 나와 있다. 이분의 《이충무공행록(李忠武公行錄)》에 보면 "공이 이로 인해 정신이 쇠약해졌다"라고 하는데, 이순신이 그리도 슬퍼했던 이유는 물론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과 이면이 자신을 많이 닮아서 유독 귀여워하던 자식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면은 명량 해전 직후 이뤄진 보복성 침략 때문에 죽었으므로 비록 전투는 이겼으나 자신 때문에 자식이 죽었으니 그 자책감은 이루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셋째 아들 이면에 대해서는 후에 야사가 하나 전해 내려오는데, 죽은 면이 꿈 속에 다시 나타나 울며 "소자를 죽인 자가 근처에 있나이다."하고 사라졌다. 이순신이 꿈에서 깨고는 이상히 여겨 한참을 생각하다가 문득 아산에서 전투를 벌였던 일본군 포로들을 끌어와 심문하니 과연 그중에 면을 죽인 자가 있어 즉시 그를 베어버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공사 구분은 융통성이 없는 수준으로 엄격해서 아무리 상관이나 친인척이라도 예외가 없었다. 35세에 종8품 훈련원 봉사 시절에는 병조 정랑 서익이 원칙에 어긋나는 인사를 지시하자 칼같이 거절했다가[69] 이듬해 종4품 수군 만호로 재직 중, 병조 정랑이었던 서익이 군기 경차관으로 와서 감찰로 트집을 잡아 파직되기도 했다. 같은 덕수 이씨였던 율곡 이이[70]가 이순신이 초급 군관 시절 한 번 만나보고 싶어했는데, 당시 이율곡은 지금의 행정부 장관에 해당하는 이조판서로 지낼 무렵이었다(1년 뒤 국방부 장관급인 병조판서가 됨). 당시 이런 장관급이 호의를 보인다면 출세길 열렸다며 튀어가고 현대에도 이런 고위 인사를 등에 업고 각종 청탁이나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이순신은 "(율곡께서) 이조 판서로 있으신 동안은 인사권이 있으시니, 저는 만날 수 없습니다."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물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로비' 권고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았는데 병조 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고 싶어 매파를 띄웠으나 단칼에 거절하기도 했다.
이같은 엄격함은 자신의 친인척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이순신의 장남인 이회와 조카 이분, 이완, 이봉[71]은 전쟁 내내 별다른 무관 관직조차 없이 일개 의병 신분으로 참전했다. 조선 시대에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친인척끼리는 같은 임지에서 관직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상피제가 있었는데 이를 충실하게 지킨 것이다.
이완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야 무과에 급제하고 본격적으로 무관의 길을 걸었으며, 후에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의주성에서 후금군을 상대로 분전하다가 종제 이훈과 함께 전사한다. 서자 이훈과 이신은 무과에 급제했는데 이신은 이괄의 난때 격전지였던 안현 전투에 참전했다 전사하고, 이훈은 정묘호란때 이완과 함께 의주를 지키다 전사했다. 두 사람 모두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해 무덤을 만들지 못했다. 정유년에 아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삼남 이면까지 포함하면 다섯 아들 중 4명과 조카 3명이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전장에서 분골쇄신했다. 집안의 이단아(?) 차남 이예[72]는 순수 문관으로 형조정랑을 역임했으며 사후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덕수 이씨는 이순신 사후 조선 유수의 무반 명가로 자리하는데 무과 합격자 명단인 무과방목에선 78명의 덕수 이씨 합격자가 확인되며 이중 75명이 이순신 사후 나온 합격자다. 75명이 적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현존하는 무과방목(합격자 명단)은 조선시대 실시된 총 무과 횟수의 20%가 채 안된다. 70명 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은 전체 2,513 성관에서 덕수 이씨 포함 74개에 불과하다.
또한 덕수 이씨 세보를 참고하면 숫자가 아득히 늘어나는데 이순신 아래로 무과 급제자가 무려 267명이다.
9. 후손[편집]
leedescendant
이순신의 활약으로 인해 그의 본관인 덕수 이씨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무반 가문으로 손꼽히게 된다. 무과 급제가 무려 267명이나 되는데 문과 급제는 단 1명[73]에 불과한 엄청난 밸런스 붕괴. 이순신의 조상대에선 성균관 대제학을 역임하거나(이변) 병조참의로 재직하며 세자의 스승 노릇을 하였고(이거), 할아버지 이백록과 아버지 이정도 미관말직이나마 지낸 적이 있는 전통적인 문반 가문이었는데 이순신을 기점으로 무반 가문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74]
이렇듯 그의 후손들은 충무공의 후예라는 이유 때문에 진로선택 시 무반을 강요당한 정황이 보이는데, 정작 실록에 기록될 때는 충무공에 비해서 뭐뭐가 부족하다는 식으로 맨날 조상이랑 비교당하며 까였다. 조상을 잘 만난 건지, 잘못 만난 건지...그래도 한몸을 바쳐 종묘사직을 지켜낸 사람의 후손이라 조선 시대 내내 특별대우를 받았다.
5대손 이봉상(李鳳祥, 1676~1728)은 심각하게 무능했던 사람으로, 오죽하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냥 무능하다는 이유만으로 탄핵 상소까지 올라왔다가 기각됐을 정도였다.[75] 하지만 이쯤 되면 무능이 아니라 조상과 저울질 당하는 탓이 큰 듯하다... 충청병사로 재임하던 시절 이인좌의 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사로잡히기는 했으나 투항을 거부하여 피살되었는데, 이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바로 "너는 충무공 집안에 충의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빨리 나를 죽이지 않느냐?"였다. 능력은 없을지언정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라는 자부심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결국 이 점을 높이 사 사후에 충민공(忠愍公)[76]으로 추존되고 조상인 이순신과 함께 현충사에도 배향되었다.
이외에도 정조 시기에는 이인수, 이승권 등이 있었다고 하며 근대 시기에는 독립운동가를 여럿 배출하면서 독립유공자 집안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12, 13, 14대 종손인 이세영, 이종옥, 이응렬이 있다. 이순신 장군 후손, 일제강점기 3대 걸쳐 항일독립운동 투신, 이순신 장군 13대 종손도 항일무장투쟁 첫 확인. 9대 종손 이필희, 10대 종손 이규풍, 이규갑, 이규현, 11대 종손 이민호, 이민화, 12대 종손 이길영, 이일영도 독립운동가다. 다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고 부계 후손은 아니지만 친일파인 권중현도 있다.[77] 집안의 수치
현대에는 방송인 이종환, 배우 이미숙이 있다.
10. 인간관계[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인간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묘소[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 어록 및 장계[편집]
'(전라)좌우도의 전선은 본시 있던 것과 새로 만든 것을 물론하고 먼저 집합한 것이 110척이요, 사후선도 110척이라 사부, 격군을 합해서 무려 1만 7,000여 명이나 됩니다. 1명당 아침, 저녁으로 각각 5홉씩 나누어준다면 하루 먹을 것이 적어도 100여 석이요, 1달에 드는 것이 3,400여 석 입니다. 경상우도는 벌써 바닥이 나서 식량을 각출할 도리가 없고, 전라도 열 고을만 쳐다보는데, 열 고을에서도 남아 있는 군량에서 백성들을 구제할 식량을 제하고 나면 수군들 먹을 군량은 겨우 앞으로 2달 남짓, 5월 보름께 밖에 더 계속되지 못할 실정입니다.'
《청조획군량장》 갑오년 3월 10일 中 - 군량미를 걱정하는 이순신 장군
'수전과 육전의 어렵고 쉬운 점, 그리고 지금의 급한 일들을 들어가며 다음과 같이 망령되이 진술하는 바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십중팔구는 겁쟁이이고, 용감한 자는 열에 한둘밖에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분간되지 않고 서로 섞여 있지만 일단 소문만 들리면 그저 도망갈 생각만 하고 놀라서 달아나는데.....[생략] ...... 수전의 경우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모두 다 같은 배 안에 있으므로 적선을 바라보고 비록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갈 수가 없으며 노질을 재촉하는 북소리가 울리면, 그 뒤를 군법이 따르니 모두 전력을 내어 싸우게 됩니다. 이것은 수전의 쉬운 점입니다.'
《선조실록 계사년 9월 10일》 中 - 이순신 장군이 바라본 육군과 수군의 통솔 차이
수사가 수군의 대장으로서 호령을 내리더라도 각 고을의 수령 등은 자신의 소관 사항이 아니라고 핑계대면서 전혀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군사상 중대한 일까지도 내버려두거나 등한시하는 일이 많아서 매사가 이완되고 있으므로 이런 큰 사변을 당하여 도저히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감사와 병사의 예에 따라서 고을의 수령들까지 수사의 지휘를 받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조실록 계사년 9월 10일》 中 - 이순신 장군이 바라본 전시행정
三尺誓天삼척서천 山河動色산하동색
一揮掃蕩일휘소탕 血染山河혈염산하
석 자 칼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이순신의 장검 2자루에 새겨져 있는 문구이며, 해당 문구는 이순신의 친필이다.[78]
鑄得雙龍劍주득쌍룡검 千秋氣尙雄천추기상웅
盟山誓海意맹산서해의 忠憤古今同충분고금동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
쌍룡검에 새겨져 있는 문구
閑山島月明夜上戍樓한산도월명야상수루 撫大刀深愁時무대도심수시 何處一聲羌笛更添愁하처일성강적경첨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79]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의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勿令妄動물령망동 靜重如山정중여산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거이 침착하라!
옥포 해전을 개시하면서
祭死亡軍卒文(제사망군졸문)
親上事長(친상사장) 爾盡其職(이진기직)
投醪吮疽(투료연저) 我乏其德(아핍기덕)
招魂同榻(초혼동탑) 設奠共享(설전공향)
윗사람을 따르고 상관을 섬기는 등 너희는 그 직책을 다하였건만
막걸리를 주고 종기를 뽑는[80] 등 나는 그런 덕이 모자랐도다
혼을 한 자리에 부르노니 차린 제물 받으오시라
죽은 군졸을 제사하는 글
今臣戰船금신전선 尙有十二상유십이
戰船雖寡전선수과 微臣不死則미신불사즉 不敢侮我矣불감모아의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81]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에 실려있는 명량 해전에 앞서 올린 장계.
必死則生필사즉생 必生則死필생즉사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82]
난중일기[83]
此讎若除차수약제 死即無憾사즉무감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今日固决死금일고결사 願天必殲此賊원천필섬차적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백사집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戰方急전방급 愼勿言我死신물언아사
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면서 남긴 유언[84] - 이분[85]의 충무공행록
임진장초 및 난중일기 원문 번역 사이트들[86]##임진장초 원문
自壬辰至于 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拒其路也 今臣戰船 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是賊所以爲幸而由 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不敢侮我矣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은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적들이[87]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명량 해전 이전, 조정에서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를 반박하며 수군을 끝까지 지휘하겠다는 주장이다.
招集諸將約束曰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爾各諸將, 勿以生爲心, 小有違令, 卽當軍律。'再三嚴約。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9월 15일(명량 해전 전날)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발언은 흔히 이순신이 직접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난중일기에서도 언급했듯이 병법, 정확히는 오자병법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무조건 죽을 각오로 옥쇄해라'라고 잘못 해석하기도 하나,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필사즉생행생즉사 문서로.
日本之人, 變詐萬端, 自古未聞守信之義也。兇狡之徒, 尙不斂惡。
왜적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교활하고 흉악하여, 그 악랄함을 감추질 않습니다.
답담도사금토패문(答譚都司禁討牌文, 담종인에게 보내는 답장 중에서.-이충무공전서 1권 잡저中)
강화 협상을 하며 전쟁이 소강 상태가 된 1594년, 명나라 칙사인 담종인이 '함부로 왜군과 교전하지 말고 자리를 지킬 것'이란 내용의 통보인 금토패문(禁討牌文)을 보내자, '답담도사금토패문'이라는 이를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현대에는 이 중 '저 왜적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라는 구절이 특히 유명하다. 2010년대 이후 한일관계가 크게 나빠지고 한국 내 반일감정이 더 강해지면서, 저 문구를 인용하는 사례가 크게 늘었다. 번역본은 왜로 알려졌지만 원문은 보다시피 日本.
이어서 투항해온 왜놈에게 술과 음식을 먹였다.
1596년 1월 15일자 (양력 2월 12일) 일기 中
어두울 무렵 항복해온 왜놈들이 광대놀이를 차렸다. 장수된 사람으로서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만, 붙좇은 왜놈들이 놀이를 간절히 바라기에 못하게 하지 않았다.
1596년 7월 13일자 (양력 8월 6일) 일기 中
항왜 관련.
승장 의능에게 천민의 신분을 면해준다는 공문을 봉하여 올렸다.
1594년 1월 14일자 (양력 3월 5일) 일기 中
장언춘(張彦春)을 천민에서 면하게 하는 공문을 만들어 주었다.
1595년 2월 14일자 (양력 4월 4일) 일기 中
면천 관련.
잠깐 비가 내렸다. 나라 제삿날{인종(仁宗)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홀로 다락 위에 기대어 나라의 돌아가는 꼴을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마치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기둥(동량棟樑)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주석柱石) 같은 인물이 없으니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되어갈지 모르겠다. 심사(心思)가 번란해서 종일 엎치락뒤치락하였다.
1595년 7월 초1일자 (양력 8월 6일) 일기
13. 평가[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후대의 평가와 각국의 평가를 모아놓은 문서. 일본 웹에서의 왜곡도 포함되어 있다.
14. 대중매체에서[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 관련 다큐[편집]
16. 관련 단체[편집]
충무공이순신기념사업회
한국서화교육협회 성웅이순신연구회
여수지구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
순천지구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
17. 관련 문서[편집]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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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순신 연표[편집]
모든 날짜는 음력으로, 이순신의 나이는 세는나이로 기재하였다. 서기와 함께 조선 국왕의 재위년도를 표시하였다.
1545년(1세) 인종 1년
3월8일: 서울 건천동에서 이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1565년(21세) 명종 20년
이즈음에 방진의 딸인 방수진과 결혼. 그 전년도였을 수도 있다.
1573년(29세) 선조 6년
훈련원 별과에 응시, 낙마(落馬)해서 탈락하다.
1576년(32세) 선조 9년
2월: 식년시 무과에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하다.[88]
12월: 종9품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으로 부임하다.
1579년(35세) 선조 12년
2월: 종8품 한성훈련원 봉사로 재직. 서익의 부당 인사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함.
10월: 충청도 병마 절도사 군관이 되어 충청도 해미 병영으로 가다.
1580년(36세) 선조 13년
둘째 형 이요신이 죽다.
7월: 전라 좌수영 관내 발포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89]로 임명되다. 관사 오동나무 사건으로 상관인 성박과 그 후임 이용에게 밉보이다.
1582년(38세) 선조 15년
1월: 군기경차관[90]으로 온 서익이 과거의 일에 대한 보복으로 근무 태만이라 거짓 보고를 올려 발포 수군 만호 직에서 파직되다.
5월: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다.
1583년(39세) 선조 16년
7월: 함경남병사 이용이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삼다.
8월: 경원 고을 건원보 권관으로 천거되다.
10월: 여진족 토벌의 공을 세워 종7품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하다.
11월 15일: 부친 이정이 74세의 나이로 별세하다.
1584년(40세) 선조 17년
1월: 부친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잠시 벼슬을 떠나 삼년상을 치른다.
1586년(42세) 선조 19년
1월: 복직하여 사복시 주부(종6품)가 되다.
2월: 종4품(중령)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종4품 이상의 장군직)로 임명되다.
1587년(43세) 선조 20년
1월: 맏형이었던 이희신이 사망하다.
8월: 정언신의 추천으로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도 겸직하다.
10월: 녹둔도 전투 발발. 이순신이 이일 측에 지원 병력을 요청했으나 거절, 그럼에도 이경록과 둘이 전투를 치뤄 승리하다. 그리고 전투 후 함경북병사 이일의 모함으로 1차 백의종군(보직해임) 처벌이 내려지다.
1588년(44세) 선조 21년
1월: 여진족 시전부락 공격에 참가, 공을 세워 사면되어 백의종군 해제.
6월: 아산으로 내려가다.
1589년(45세) 선조 22년
1월: 비변사에서 불차채용[91]을 하게 되자 이산해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다.
2월: 이광의 추천으로 전라도 감사 휘하 조방장에 임명되다.
11월: 선전관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가다.
12월: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이 되다.[92]
1590년(46세) 선조 23년
7월: 류성룡이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천거했으나 사간원의 반대[93]로 개정되다.
8월: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94]로 천거되었으나, 역시 사간원에서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개정되다.
1591년(47세) 선조 24년
2월 13일: 이억기, 이천, 양응지와 함께 이순신을 남해 요해지로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선조의 전교를 받았고, 이전처럼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종6품 정읍현감에서 종4품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 전에 정3품(소장)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초수(超授)하다.
1592년(48세) 선조 25년
4월 12일: 거북선(귀선) 건조를 완료하다.[95]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다.
4월 15일: 전쟁 발발 소식을 고지 받다.
5월 4일: 전라 좌수군의 1차 출동.
5월 7일: 옥포와 합포에서 승리로 거두다.
5월 8일: 적진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5월 : 종2품 하계 가선대부로 가자되다.
5월 29일: 전라좌수군의 2차 출동. 사천 앞바다에서 승리로 거두다. 이때 이순신이 총상을 입었다. 거북선을 실전에서 처음으로 사용하다.
6월 2일: 당포 앞바다에서 승리를 거두다.
6월 5일: 당항포에서 첫번째 승리를 거두다.
6월 7일: 율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6월: 정2품 하계 자헌대부로 가자되다.
7월 6일: 전라 좌수군의 3차 출동.
7월 8일: 한산도에서 승리를 거두다.
7월 10일: 안골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7월: 정2품 상계(중장과 대장 사이 실질적으로 도원수[96] 정헌대부로 가자되다.
8월 24일: 전라좌수군의 4차 출동.
8월 29일: 장림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9월 1일: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부산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1593년(49세) 선조 26년
2월 6일: 전라좌수군의 5차 출동.
2월 10일: 웅포로 진격하다.
3월 6일: 웅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5월 2일: 웅포에서 2번째 승리를 거두다.
7월 15일: 전라좌수영 본영을 한산도로 이주하다.
8월 15일: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다.
1594년(50세) 선조 27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6번째 출동.
3월 4일 당항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9월 29일 장문포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두다.
10월 1일 영등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10월 4일 장문포에서 2번째 승리를 거두다.
1597년(53세) 선조 30년
2월 6일: 선조가 이순신의 파직을 명하다.
2월 10일: 부산포로 출정해 무력 시위를 벌이고 돌아오다.
2월 25일: 통제사 직에서 해임되다.
2월 26일: 후임 삼도수군통제사인 원균에게 인계 후 서울로 압송당하다.
3월 4일: 감옥에 갇히다.
4월 1일: 옥중 생활을 마치고 나오다.[97]
4월 2일: 류성룡을 만난 후,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지시 받고 내려가던 도중 아산에 들러 잠시 머물다.
4월 11일: 어머니가 사망하다.
4월 13일: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하다.[98]
7월 23일: 이조판서 이항복, 경림군 김명원의 건의로 이순신이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하다.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수군을 폐하라는 지시를 전하다.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배 12척이 남아있나이다."라는 장계를 올리며 수군의 폐지를 반대하다.
8월 18일: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전선 12척을 인계받다.
8월 28일: 어란진에서 왜선 8척과 조우, 교전 끝에 승리를 거두다.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기다.
9월 2일: 배설이 도주하다.
9월 16일: 전선 13척과 피난선에 힘입어 명량(鳴梁)입구인 임하도의 좁은 목(우수영 앞바다)을 이용하여 일본군 133척과 맞서 싸워 승리하다.
10월 14일: 셋째 아들 이면의 전사 소식을 듣다.[99]
10월 29일: 고하도로 진을 옮기다.
1598년(54세) 선조 31년
2월 17일: 고금도로 이진하여, 새로운 통제영으로 삼다.
7월 19일: 절이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9월 20일: 명군과 합류해 장도에서 승리를 거두다.
10월 7일: 명군과 합류해 왜교성에서 전투를 진행하였으나, 명군의 무리한 전술로 소득을 얻지 못하고 물러나다.
11월 19일: 퇴각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요격하던 중 관음포에서 총탄에 맞아 전사하다.
1604년 선조 37년
덕풍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이후 좌의정에 추증되다.
1643년 인조 21년
충무라는 시호를 받다.
1706년 숙종 32년
충청도 유생들의 상소로 사당 건립을 윤허받다.
1707년 숙종 33년
숙종이 친히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하사하다.
1793년 정조 17년
영의정으로 추증되다.
19. 여담[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여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로마자로 표기할 시 현행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따르면 'I Sunsin',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따르면 'I(Yi) Sun-sin'이다. 관습을 고려해 일반적으로 성씨는 Yi로 표기한다.
[2] 장우성 화백의 1953년작 조복좌상 영정으로,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1973년 정부에서 표준영정으로 지정하였다. 이순신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린 초상화들이 일제강점기까지에도 남아있었으나 일제강점기와 1960년대를 거치면서 확실한 초상화는 해외로 반출되거나 도난등으로 현재 없기에 현재 전하는 초상화나 동상에 묘사된 이순신의 얼굴은 전부 상상한 것이다. 이 영정은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이순신을 일컬어 '용모가 단아하고 정갈하였다(容貌雅飭)'고 묘사한 것에 근거하여 그린 것이지만, 복장이 19세기의 것으로 고증오류가 있으며 작가의 친일논란도 있어 표준영정 해제가 추진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용모' 문서의 표준영정 논란 단락에 나온다.
[3] 당시 유럽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4월 18일. 그레고리력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1582년에 개력했으므로 이순신이 태어날 당시에도 아직 그레고리우스력(그레고리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4] 인현동1가 31-2번지.
[5] 1596년 경상좌도와 경상우도가 경상도로 합쳐졌다.
[6] <서경書經>에서 순 임금이 우 임금을 지목하며, "오직 너(汝)여야 (세상을) 화평(諧)케 하리라"(제왈무帝曰毋 유여해惟汝諧)고 말한 대목에서 추려 따왔다. 성웅의 휘가 "순(舜)임금 같은 성군을 모시는 신하(臣)", 또는 "신하로서 순임금처럼 영걸"이라는 점에서 이름자와 상보적이며, 이는 조선 시대에선 보편적인 작명법이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행장으로 봐도 매우 알맞다고 할 만하다. 공의 어머니 초계 변씨가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련 내용
[7] 선조수정실록 1591년 2월 1일자 기사에서 이순신을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 다시 가리포 첨사에 제수했으나 둘 다 부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라좌수사에 임명했다 한다.
[8] 키가 6척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조선시대의 1척이 31.1cm인 것을 보아 31.1*6=187cm라는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한 신장이 나온다.
[9] 이순신을 류성룡과 친분으로 남인으로 보는 경우가 있지만 생전에는 사실상 무소속이었다.
[10] 이순신 본인이 영의정이었던 적은 없고 사후 정조 시기 추증된 것이다.
[11] 음력 3월 22일
[12] 권지는 임시직 또는 실습생 이라는 뜻이다.
[13] 서출자녀들은 전부 해주 오씨의 소생들이다.
[14] 혹은 ยี่ ซุนชิน
[15] 수도 서울의 중심 광화문 광장에 큰 동상이 세워져있다.
1968년 4월 28일 건립되어 현재까지 55년동안 수도 서울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16] 평가 목록에 후술되어 있듯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서방권 장군들도 이순신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전승했을 뿐만 아니라 배를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17]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가 말하기를 "이순신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면 한나라의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룬다 할지라도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명성과 의열은 아직도 사람에게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라며 매우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연의의 전략가 제갈량과 정사의 명재상 제갈량 중 어느 쪽을 일컬은 것인지는 불분명한데, 당시 사대부들이 중국사에 빠삭했다는 점, 정조가 삼국지연의를 수호전과 더불어 잡서 취급하며 읽지 않았다는 점(승정원일기 정조 23년 5월 5일)으로 미루어 보면 후자로 추측된다. 반면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대화를 나눌 때, 자신의 충성과 덕망과 재주 모두 무후(제갈량)만도 못하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18] 애초에 한국에서 이 수사는 이순신만을 위해서 사용된다. 이해가 안 간다면 한국 사람들이 이순신 말고 다른 위인을 성웅이라고 부르는 적이 있는가 생각해보자.
[19] 싸운 상대가 역사상 거의 언제나 중화사상을 고집하고 체급만 봐도 훨씬 큰 중국이 아니라 오늘날 범세계적으로 소프트파워를 발휘하는 복잡한 사이의 이웃인 일본이었다는 점 때문에 꺼리는 사람도 있지만 잔 다르크가 영웅 대접을 받는다고 영국이 악당 취급받는 것이 아니며 당시의 일본군 상당수가 약탈과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 그리고 일본이 더 나은 나라가 맞다고 해도 한국이 일본의 일부로 남는 것은 독립국 상태보다도 생활수준이 아래일 가능성이 높음을 고려하는 편이 좋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이 부분적 근대화가 이루어진 것도 본토 중심적으로 맞춘 결과라는 평이 주류다. 차별과 수탈, 학살, 징용, 강간으로 인한 희생들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20] 위의 한국갤럽 조사만 보아도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각각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세종이 1위를 차지한 다른 설문조사들도 많고 확실한 건 둘 중 누구도 3위로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21] 진주시에선 김시민 충무공을 지명으로도 쓰고 적극적으로 홍보해서 다른 충무공도 있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22] 봉사 시절에 서익이 병조정랑이었는데 그가 친구를 훈련원 참군에 추천했다가 거절하면서 미움을 샀다.
[23] 일찍이 이순신이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가 자신이 거절했던 건이 들통날까 두려워서였다고도 한다.
[24] 선조는 도덕성이 부족했지만 머리는 비상했던 인물이었고, 전쟁 전까지 이순신을 고속승진시킨 장본인이었던데다 개전 이후 이순신의 활동상도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이때 이순신에게 죽임이라는 생각 짧은 처분을 밀어붙였다는 것은 뜻밖의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핍박은 둘째쳐도 이 정도의 능력자는 죽이기는 아깝다는 생각을 못 했다는 것.
[25] 김유신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김유신도 뛰어난 영웅인데도 사람을 초월한 행적을 보여온 이순신과 비교하면 현실적인 영웅이라는 서술이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김유신에 관한 유일한 기록인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이 열전을 쓰기 위해 참고할 삼국시대 당시의 기록이 부족했던 탓에 김유신의 후손이 쓴 김유신 행장록 원본 총 10권 중에서 내용을 추려서 옮긴 것이다. 그 때문에 실제 역사와 교차검증을 하게 되면 맞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김유신 열전에서는 김유신이 전투에 나갔다 하면 매번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고 묘사되지만 실제 당시의 신라는 오히려 수도 서라벌까지 적국에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우에는 비교적 근대의 일이고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 같은 풍부한 조선 측 기록과 일본 측 기록들을 통해 교차검증이 된 것도 많아서 사실로 인정된다.
[26] 물론 울돌목은 좁았기에 병목 현상이 발생해 133척 전부가 싸울 수 있던 건 아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도 울돌목이 배가 1척씩만 드나들 수 있는 구역인 것도 아니었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기술이나 화력이 압도적인 격차를 보인 것도 아닌데 대장선 1척이 적군을 죄다 두들겨 팬 건 보기 드문 일이다.
[27] 난중일기의 1592년 9월 18일자(갑술 양력 10월 22일) 기록에서 <"행재소에서 쓸 종이를 넉넉하게 올려 보내라"고 하였으나, 계본을 받들고 가는 사람이 고생스럽게 길로 무거운 짐을 가지고 갈 수 없으므로 우선 장지(狀紙) 열 권을 올려 보냄을 써 올렸다.>라고 썼고 이튿날에는 배로 행재소에 실어 간 이야기까지 썼다. 행재소는 왕이 상주하는 궁궐을 떠나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이며, 계본은 조선 시대에 왕에게 제출하던 문서 양식이고 장지는 지방 벼슬아치들이 임금에게 보고하는 글을 쓴 종이를 뜻한다.
[28] 현재 일본에서는 당연히 이순신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게다가 2012년 아베 신조 정권이 장기 집권하면서 일본 사회에서 혐한이 점차 강해지자 이순신을 무슨 전쟁 범죄자 취급하는 몰지각한 일본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한 예로 한국 해군이 수자기를 달자 자위대에서 "이순신을 연상시킨다"며 항의한 일이나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이순신의 초상이 들어간 헬멧을 쓴 아이스하키 선수한테 항의하여 쓰지 못하게 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29] 아무리 찾아도 부정축재 기록은 전혀 없다.
[30] 대표적으로 명량 해전 때 자신의 공로를 안위에게 몰아준 것이 있는데, 그 덕에 안위는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31] 실제로 이순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은 전투에 따른 사상자보다 군율 위반으로 인한 처형자가 더 많았다.
[32] 다만 일선 장수가 아닌 장군으로 보자면 지나치게 올곧은 성격 탓에 정치 감각이 떨어지고, 자기 휘하의 과거시험은 자기가 치르겠다는 등 인사권에 욕심을 냈다고 의심을 살 수 있는 행동을 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본인의 아들들이 무과 등과할 성적이 되었음에도 합격하지 못했다(조선 시대엔 상피제도가 있었다). 헌데 그 인사권이 구별되지 않은 조선 시대에서는 그것이야말로 억지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순신이 명군 장수들을 어떻게 상대했는지를 보면 알겠지만 조정과 조율할 능력이 없었다기 보다는 안 했다는 것에 가깝다는 말이 있는데, 그 명나라 군대보다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조선 조정이 이순신의 제의를 대놓고 무시한 것이 더 크다. 집중적으로 전선만 생각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순신을 보호해주고 밀어주었다는 선조 입장이란 변명으로 쓴다면, 의심과 배신감이란 주제넘는 망상이 선조의 정신을 장악했을 것이며, 정부 행정력 확보 측면에서는 능력도 없는 주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 사항이라 망상하며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33] 징비록에 기록된 어린 시절에서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라는 대목이나,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에서 일본인을 두고 "간사하기 짝이 없어 신의를 지킨 적이 없다"라고 발언한 것 정도? 직업이 무관이었던 만큼 대량 살상에 일조했으므로 성인 칭호는 무리라 할 수도 있겠지만, 당대 일본군도 죄업은 쌓았고 이순신이 사망한 곳이 조선 영해라는 것, 또한 이순신이 일찍이 전쟁 이전에 어느 정도 예상하며 취했던 행위에도 대일 선제공격이라는 선택지는 없었고, 그저 자국 방비 훈련에 그쳤다는 점을 감안해 보자. 애초에 한 지역 단위의 수군 장수일 뿐인데 정부에다 외국을 치자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지만. 상술된 답문에서도 해당 대목은 일본지인(日本之人)이라 해서 일본인 전체를 대상으로 했다는 비판을 들을 법도 하나, 초반부에서는 이러이러한 원한에 대해 "잔흉(殘兇)을 남기지 않고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다"라는 표현까지만 하고 본토의 일본인들까지 정벌하겠다 같은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게다가 난중일기에 따르면 항복한 일본 병사인 항왜들에게 술과 음식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항왜들이 부대에서 축제를 열고 싶어하자 허락해 주고, 그들의 광대 놀음을 함께 구경하기도 하는 등 일본인이라고 마냥 증오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특히 명량 해전이라는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항왜인 준사를 곁에 두고, 그의 증언에 따라 물에 빠진 마다시의 목을 베어 내걸어 그 자리에서 일본군의 사기를 완전히 꺾고 승기를 굳히기도 했다. 즉, 일본인이라도 항복한 포로는 인간적으로 대우해주고, 함께 싸우는 항왜들에게도 차별의 시선을 보이지 않았다.
[34] 한자는 '있을 유' 이지만 옛 한자 문법으로 말을 시작할 때 관용적으로 붙이는 글자로 영어로 치면 'the' 정도에 해당한다. 단순 문법으로 중국만 쓰라는 법은 없고 '有朝鮮' 등으로 쓸 수 있으며, 고려가 금석문에 '有高麗'를 많이 썼다.
[35] 추증받은 품계와 직위. 이순신에 대한 추증은 하도 여러 번 이루어져, 최종판이라 볼 수 있는 충무공 묘표를 따른다.
[36] 직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직위들을 겸했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37] 시호란 뜻이다.
[논란] 최초 기록은 실록이다. 정조 38권, 17년 7월 21일(임자) 첫 번째 기사. 명나라에서 도독 벼슬은 '정1품'이다. 다만, 이와 관련하여 실제로는 명 도독직이 수여된 것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는데, 정작 수여를 한 명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명사(明史)와 명실록(明實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충렬사에 소장된 도독인(印)의 글씨체도 다른 명나라 도독인의 글씨체와 전혀 다르다.연구 결과 현대 학자들도 여러 의견이 상충되고 있으며, 명확한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보통 벼슬을 제수할 때는 현재의 계급과 보직에 해당하는 산직과 실직이 주어지게 되는데, 이 '수군 도독'이라는 벼슬은 보직에만 해당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나 '특진보국삼중대광'과 같은 산계 즉 계급이 없다. 산직이 없이 실직만 가지고 있는 벼슬아치는 없기 때문이다. 해당 사항에 대해서는 이순신/논란 문서로.
[39] 선무공신은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려졌는데, 그중 1등급이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이다. 한 등급이 낮아지면 두 글자씩 뺀다. 1등 공신을 받은 사람은 딱 3명인데, 이순신, 권율 그리고 원균이다. 심지어 선조는 조정 신료들이 탐탁지 않게 여김에도 불구하고 아득바득 우겨서 원균을 상기 등급에 봉한 반면, 이순신을 최고 등급 공신으로 봉하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껄끄러워 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공이 천하를 덮었고, 아무리 가리려 해도 가릴 수 없었기에 당연히 공신에 책봉되고 그것도 으뜸인 원훈으로 봉해진다. 공신 책봉 과정에서 선조가 보여준 모습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질투와 공포가 얼마나 막장까지 치달아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40] 정1품의 품계. 그것도 같은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보다 상위 품계이다. 조선에서는 삼정승 및 각부 영사만 이 품계를 가지고 있었다.
[41] 임진왜란 종전 직후에는 우의정, 그 후에 선무공신에 봉하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영의정으로는 정조 때 가증. 이때 정조가 말하길, "충무공이 돌아가신 이래로 아직까지 영의정에 봉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과연 조선 시대 충무공 1등 팬이라고 할 만하다.
[42] 풀어쓰면 영경연, 영홍문관사, 영예문관사, 영춘추관사, 영관상감사이다. 영의정이 당연직으로 겸직하는 관직들이라 여기 같이 붙었다. 영의정이 겸직하는 관직 중에 세자시강원의 세자사(世子師)도 있지만 무관인지라 빠진 듯하다. 같은 품계를 추증받은 권율은 문관 출신이라 그런지 세자사가 같이 추증되었다. 이순신이 사후 받은 현대식 정의의 직위는 수군 도독, 영의정, 2가지다. 다른 영경연, 영홍문관사, 영예문관사, 영춘추관사, 영관상감사는 영의정이 오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명예직들이다.
[43] 덕풍 지역의 부원군. 덕풍은 본관인 덕수(德水)의 별칭이다.
[44] 역대 임금이나 공신들에게 내리는 이름이다. 문반은 '文', 무반은 '忠'으로 시작하는 시호가 가장 격이 높다.
[45]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붙은 것이 아니고, 사후 증직이 되었을 경우 살아 있을 때 지냈던 관작 앞에 붙인다. 행수법을 쓸 경우 품계가 아니라 실무직 앞에 붙어 '정헌대부 행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야 한다.
[46] 정2품의 품계로, 고려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문반우대를 보여준 예시로서 고위직을 문반이 장악하고 통제하기에 용이하고 군사 분야에서도 군 고위직에 문반들을 임명하는 것에 이상이 없게 하기 위한 장치다. 무반도 병마절도사가 되려면 종2품 가의대부 / 가선대부를 받아야만 한다. 무반 품계는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이 최고이고, 그 이상으로 가려면 문반 테크를 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정유년 파직되기 전 품계는 정2품 상계인 정헌대부였다. 그러나 이후 이순신이 다시 복직될 때 품계는 정3품 절충장군인데 이는 선조가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라며 겉으로는 사과를 하면서도, 한편으론 이순신에게 엿을 선사한 것이다. 오늘날 육군으로 치면 대장(진) 군사령관에게 반란죄 누명을 씌워 남영동 분실로 끌고가 물 고문하고 이등병으로 강등시킨 뒤 상황이 급해지니깐 다시 군사령관으로 복직시키면서 계급은 투스타로 준 격이다. 명량 해전의 기적 같은 대첩 이후에도 선조는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는 것을 꺼렸다. 1년 전만 해도 정헌대부의 품계를 받은 분이었기 때문에 그냥 기존의 품계를 돌려주면 되지만 선조는 끝까지 버틴다. 결국 명나라 경리 양호나 군문 형개 등이 끈질기게 선조를 압박하며 "이순신 장군의 벼슬을 올려주라"고 조르자 그제서야 정헌대부의 품계를 돌려주는 천하제일의 찌질함을 선보인다.
[47] 이순신이 생전 받은 직위를 현대식으로 옮겨보면 직속 함대사령관 겸 해군작전사령관 겸 해군참모총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현대의 해군참모총장 개념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긴 하다. 당시 편제를 봐도 각 함대의 사령(경상 좌/우수사, 전라 좌/우수사, 충청수사)이 각각 따로 있는 상태에서 5명의 수사(水使)의 총사령을 맡는 직책이며(이외 다른 수영은 삼도수군통어사가 지휘한다.) 수사가 삼도수군통제사보다 한 직급 아래(수사는 정3품, 삼도수군통제사는 종2품)라는 걸 감안하면 더욱더 해군참모총장보다는 해군작전사령관에 비유하는 게 맞는다. 현대 대한민국 해군도 해군본부가 아닌 해군작전사령부에 각 함대사령부와 작전전단의 지휘권이 있다. 다만 삼도수군통제사는 현대로 비유하면 군령권(작전권)과 군정권(작전 이외 교육, 인사, 기술행정)을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군정권을 가지는 해군참모총장이 군령권을 담당하는 해군작전사령관까지 겸임하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48] 실제로 대한민국의 해군참모총장은 대장 계급으로 장관급의 의전을 받는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관직 체계상 통제사는 종2품직으로 차관급이며, 이순신이 칠전량 패전 이후 복귀할 때에는 정3품직으로 어쩔수 없는 전시 상황에 발탁된 것이지, 잘못된 모함에 대한 해결을 받지 못한 채 있었다. 다만, 삼도수군통제사 직이 만들어 졌을 때, 이미 이순신은 국방부장관이라 할 수 있는, 병조판서와 동급인 정2품 상계 정헌대부의 품계였고, 또한 일시 파직으로 인해 몰수된 정2품 품계를 명량 해전 이후 명나라 경리 양호의 압박 때문에 선조가 돌려 주었으므로, 현대에 빗대봤을 때, 대장 계급으로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봐도 무리는 없다. 게다가 현재 국군을 기준으로 봐도 비록 장관급 대우를 받긴 하지만 해군참모총장은 엄연히 장관인 국방부장관 아래다. 삼도수군통제사가 국방부장관 격인 병조판서의 바로 아래인 종2품이라는 걸 감안하면 종2품이더라도 현대의 해군참모총장으로 봐도 별 무리가 없다.
[49] 애초에 조선시대와 현대의 관직과 사후 추증을 정확히 대응하여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충무공의 사후 당시 충무공에 대한 위상이나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순신에 대한 국민감정을 모두 고려해도 이러한 훈장이 무리라고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사후에 어떠한 대접으로도 이순신의 업적과 희생을 온전히 아우르긴 힘들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50] 친왕급으로서 당시 선조와 동일한 품계다. 다만 실제 의전에서 황제의 친족인 친왕이나 제제후국왕 중 제일인 조선국왕과는 비교할 수 없다. 과거에는 친왕급이라는 데 착안하여 미 부통령직이라고 써놨는데 명 관직 체계에서 부통령에 비견할 만한 관직은 없으며 친왕 역시 부통령과는 다르다.
[51] 다만 동양 관직에서 최고직은 실제로는 비워 놓은 적도 있었던 점, 영의정이 아니더라도 좌의정만 있어도 의정부 운영이 가능한 점을 생각해보면 국무총리=영의정은 아니다. 삼정승이 합의해 국무총리직을 수행한 셈이다.
[52] 오늘날로 치면 국방부 장차관을 장교라고 부르는 꼴이다.
[53]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초기에 통제사영감으로 불리다가 이후 임진왜란이 전개되면서 장군으로 호칭히 바뀐다.
[54] 서애 류성룡함의 함명 결정 문제만 보면 '해군의 자존심 문제'라는 건 농담만은 아니다.
[55] e.g. Admiral Nelson(넬슨 제독).
[56] 예) 저 아이 힘이 좋은 게 장군감이다. 또한 반쯤 조롱격이지만 미국 총기난사의 범인인 조승희를 장군이라 칭하기도 한다.
[57] 북한에서도 그들의 영도자를 무어라 호칭하는지 생각해보라.
[58] 이순신과 더불어 한국 위인 1위를 두고 다투는 세종대왕조차도 실록에 흠결이 기록되어 있다.
[59] 이열 또는 이울로 불린다.
[60] 李葂, 1577 ~ 1597. 부친을 따라 종군한 형을 대신해 고향 아산에서 가족들과 살고 있었는데, 명량대첩 직후 이순신 일가를 해하려 온 일본군에 맞서다 죽었다. 아직 어려서인지 결혼하지 않아 자녀가 없었다. 난중일기에서는 이 충무공이 2번째 백의종군 중 모친의 부고와 연이어 3남의 죽음을 전해듣고 비통해한다. 아산 현충사 권역에 묘가 있다.
[61] 이정의 조부인 이거(?~1502)가 정3품 당상관을 역임했다. 이순신에게 증조부가 되는 이거는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고 강직한 간쟁으로 이름이 높아 '호랑이 장령'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62] 창신교위는 무관품계이다. 이는 조부 이거의 공적을 생각해서 주는 것으로 무반직을 역임한 것으로 보인다.
[63] '자당'은 상대방의 어머니를 높여부르는 호칭이다. 말 그대로 이순신 어머니가 기거한 곳이라는 뜻이다.
[64] 《난중일기》, 1594년 1월 12일
[65] 출처: 문집인 《서애집(西厓集)》
[66] 실제 살던 곳도 가까웠다. 이순신이 성장한 곳은 염치읍 백암리 현, 현충사 일대이며, 홍가신은 이웃한 염치읍 대동리였다.
[67] 이순신이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글.
[68] 두 형이 함께 손을 잡고 울면서 "네가 장례도 못 치르고 이 천리 길을 떠나와 있으니 이제 누가 모든 일을 주장하겠느냐. 통곡한들 도리가 있겠느냐"하고 슬퍼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이 다음 문장에 '형님들이 이 먼 곳까지 혼령으로서 따라와 걱정해주셨다'며 두 형을 슬피 그리워했다.
[69] 병조 정랑은 품계상 정5품이지만, 그 유명한 '이조 전랑' 자리와 비슷하게 무반직 인사권을 가진 핵심보직이었다.(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전랑이라고 지칭하는 것처럼 병조의 정랑과 좌랑도 전랑이라고 지칭한다)
[70] 단, 이이와 이순신은 19촌 관계로 당대에도 덕수 이씨라는 가문만 같지 사실상 남남이었다.
[71] 이분과 이완은 큰형 희신의 이남, 삼남이고 이봉은 작은형 요신의 맏이다.
[72] 이열, 이울 등 남아있는 이름이 여럿인데 덕수 이씨 세보에는 이예(李䓲)로 적고 있다.
[73] 그것도 다름아닌 이순신의 차남 이열이었다. 다시 말해 이열 이후로 과거에 급제한 이순신 가문 사람들은 전부 무과였던 셈...
[74] 심지어 율곡 이이도 덕수 이씨 가문이었으나 이순신에게 밀렸다. 성리학을 우선하던 조선 중후반 시기에 공자와 동급으로 올리는 문묘 배향에 종묘에도 배향된 공신인 이이가 밀린 것만 봐도 충무공을 위한 대우가 얼마나 넘사벽이었는지 알 수 있다.
[75] 무능하다고 하지만 숙종 시기에 무과급제하고, 경종 시기에 포도대장, 삼도수군통제사, 총융사에 영조때는 훈련대장까지 승진을 하였다.
[76] 충성 충, 애쓸 민. 나라에 대한 충심을 지켜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했기에 붙은 시호.
[77] 권중현은 권율의 10대손으로 어머니가 이순신의 둘째였던 이예의 7대손인 이승권의 딸이다.
[78] 해당 검은 현재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79] 한 곡조의 풀잎피리 소리라는 설과, 일본 피리 소리라는 설이 있다.
[80] 부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81] 원문: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 전선이 있사오니(尙有十二 상유십이)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이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微臣不死 미신불사)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 적을 막겠다는 필승의 신념과 함께, 수군을 폐하면 적이 즉시 서울까지 갈 수 있다고 선조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이 문구는 대한민국 해군의 큰 가치로서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 해군의 가슴속에 살아있으며, 대한민국 해군 신병교육소에도 적혀있다.
[82] 이순신 만화를 그리고 있는 미국인 만화가 온리 콤판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순신의 명언으로 이걸 꼽았다.
[83] 명량 해전 전날인 1597년 9월 15일.
[84] 많은 사람들이 흔히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틀린 것이다. 보다시피 이 유언 중에 "적에게"라는 말은 한글이든 한자든 단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으며, 후세 사람들이 전쟁의 분위기에 맞추어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전장에서 적에게 아군 지휘관의 죽음을 알리면 안 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며, 꼭 지휘관뿐만 아니더라도 부상자 발생, 포탄 및 보급품 잔여량 등등 아군의 정보는 그 중요성을 떠나서 당연히 적에게 알리면 안 된다. 다만, 내용 자체는 적에게 알리지 마라는 내용이 맞다. 자신의 죽음이 알려짐 = 아군 수군들의 사기가 하락함 = 적이 자신의 죽음을 눈치채고 사기가 증가할 수 있으니 아군에게(=적에게)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내 죽음은 승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적을 물리치는 데 집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어 "적에게"란 표현이 빠진 원문이 더 비장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85] 이순신 장군의 조카.
[86]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원문이 많고, 초고본은 원문은 매우 드물다. 대신 초고본 한글 번역문은 꽤 많은 편.
[87] 원문 상에는 도적 적자가 없지만 주어를 넣어서 의미를 이해한다. 한문에서는 주어를 자주 생략하기 때문이다.
[88] 늦은 나이에 급제하였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론 거의 평균적인 나이에 급제하였다.
[89] 종4품 이상의 무관부터 장군.
[90] 일종의 병기고 임시 검열관.
[91] 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다. 1587년에 전라도 손죽도를 왜구가 침범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전라 좌수군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피하기 바빴으며, 녹도 만호 이대원만이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에서 전쟁을 준비한다는 첩보와 징후를 감지하자, 조정에서 유능한 무관들을 특채로 채용하기 위해 이러한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92] 이순신의 일대기를 볼 때 이 정읍현감 시절이 인생에서 그나마 평온했던 시기였다 할 수 있다. 정읍현감 이전엔 파직과 강등, 백의종군을 겪어야 했고 정읍현감 이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어선 전쟁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1년 뒤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 충무공의 삶은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린다. 무엇보다 정읍현감으로 재직하던 때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지내던 시기였다.
[93] 변방 수령은 만 1년이 되지 않으면 자리를 바꿀 수 없다.
[94] 만포 첨사는 특별히 정3품(소장) 당상관으로 임명하는 자리다. 성종 15년(1484년) 8월 8일(임술) 1번째 기사 경연 후 지평 한건 등과 위장 김유완의 체직·영안도의 양전 등을 논의하다. 연산 2년(1496년) 11월 13일(병진) 2번째 기사 정언 조원기가 이윤종을 만포 첨사로 제수하지 말 것을 건의하다, 연산 2년(1496년) 12월 9일(임오) 2번째 기사 가자, 김효강, 노사신 부자 등의 일로 구치곤 등이 경연에서 아뢰다, 연산 3년(1497년) 1월 22일(갑자) 4번째 기사 만포 진장에 무신으로 당상관인 재주있는 자를 보내기를 의정부가 청하다, 중종 20년(1525년) 11월 29일 갑신 4번째 기사 헌부가 김안정·서수천의 체직과 서원정 이구의 죄상에 대해 아뢰다, 명종 12년(1557년) 1월 12일(병인) 3번째 기사 조광원·이명·목첨·강섬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등의 실록 기사를 보면 만포 첨사를 당상관(정3품 上 절충 장군)으로 보임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95]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태종 때부터 있었다. 다만 태종실록에서 언급되는 귀선과 이순신이 건조했다는 귀선이 같은 종류의 배인지는 현재까지 불분명하다.
[96] 합참의장) 권율이 이 계급이었으니 사성장군으로 봐도 무방하다.
[97] 난중일기에 의하면, 이때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이 바로 무의공 이순신이라고 한다.
[98] 난중일기 中: 丁酉 4월 19일: 일찍이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목놓아 울었다. 어이할꼬, 어이할꼬. 천지 간에 나 같은 자 또 어디 있으랴. 차라리 빨리 죽느니만 못하도다.
[99] 난중일기 中: 1597년 10월 14일: 저녁에 천안에서 사람이 와서 집 편지를 전하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골육이 떨리고 심기가 혼란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열의 글씨를 보니 바깥 면에 '통곡'이란 2자가 쓰여 있기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리 어질지 못하시더냐,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맞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아 있으니 이렇게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으랴. 천지가 흑암에 덮이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네가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네 재주가 뛰어나 하늘이 이 세상에 놔두지 않는 것이냐. 내 죄가 많아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지금 세상에 살아 있으나, 이제 어디에 의지하랴.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겠으니 아직은 참고 살겠으나 마음은 죽고 몸만 남아 통곡하고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도다.